맘스커리어 - [역사를 바꾼 여성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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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여성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최영하 기자 / 기사승인 : 2023-01-05 09:4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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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만들고자 목숨을 걸었던 숨은 열사
[역사를 바꾼 여성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맘스커리어=최영하 기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중대한 순간에 존재감을 보였던 여성을 조명합니다. 시대의 억압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놨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사례들을 소개하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사진=독립기념관]

일제강점기는 민족 전체가 핍박을 받던 시기였고, 교육과 참정권 등의 민주주의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는 사실상 없는 것에 가까웠다. 따라서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여성의 공간은 더욱 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장투쟁으로 대표되는 남성 주도의 독립운동사 안에서도 여성만이 가진 위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독립에 대한 갈망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배움에의 의지로 똘똘 뭉쳤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마리아는 1891년 6월 18일 황해도 서대면 송천동에서 김윤방·김몽은 부부 사이의 3자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친은 그의 이름을 마리아로 지어줬고, 자연스레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에 언니들과 다니며 개신교 정신과 항일 정신에 입각한 평등과 신학문을 학습했다. 

 

보통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한 김마리아는 대학 공부를 권유한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5년 서울로 상경해 숙부 김필순의 집에 머물면서 이화학당과 연동여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일본 유학을 떠났다.

 

김마리아가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에 눈을 뜬 것이 바로 이때 일본에 머물면서다. 동경여자유학생 친목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점차 운신의 폭을 넓히던 그는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이어 곧바로 귀국해 전국적으로 벌어진 3·1 운동 당시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투신했다 체포·구금되고 만다. 당시 귀국하면서 2·8 독립 선언문을 기모노 안의 허리띠에 숨겨 들여온 것이 발각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 여성계를 지도하는 활동을 전개했고 그의 활동은 서울지역 여학교들이 조직적으로 3·1운동에 참가하는 데 기여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던 중 애국부인회 관계자들과 다시 붙잡혔다. 당시 일제 경찰로부터 심문을 받으면서 했던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명언은 그의 자주독립 의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때 받은 심한 고문으로 인해 후유증이 계속되면서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일제의 감시망을 뚫은 망명 성공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일이 아니라, 결단력 있는 여성항일운동가의 용기 있는 결행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인을 위해 건재함을 국내외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김마리아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현재 난징대학의 전신인 진링대학을 거쳐 미국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해외에 머무는 동안 김마리아는 주로 선진적인 서구 교육에 전념하면서 상해와 만주지역의 동포들에게 단결과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 개척에 대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에 평생을 투신했다.

 

1935년에 귀국한 김마리아는 여생을 기독교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매진했다. 1938년을 전후해 한국 개신교 주요 교파들이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고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그는 오래전 투옥 당시 심한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면서 1944년 3월 13일 평양기독병원에서 숨을 거뒀고,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해 대동강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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